코로나19 (mk.co.kr)

[Weekend Interview] ‘코로나 포화’ 대구서 복귀한 서지원 軍의료지원단장

By September 30, 2020 No Comments
서지원 대령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했던 지난 2월 말 스스로 지원해 국군대구병원으로 파견을 갔다. 서 대령은 초임 간호장교 75명을 비롯해 코로나19 초기 긴박했던 대구병원 현장에 파견된 군인력 432명을 지휘했다. [김재훈 기자]

서지원 대령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했던 지난 2월 말 스스로 지원해 국군대구병원으로 파견을 갔다. 서 대령은 초임 간호장교 75명을 비롯해 코로나19 초기 긴박했던 대구병원 현장에 파견된 군인력 432명을 지휘했다. [김재훈 기자]

서지원 대령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했던 지난 2월 말 스스로 지원해 국군대구병원으로 파견을 갔다. 서 대령은 초임 간호장교 75명을 비롯해 코로나19 초기 긴박했던 대구병원 현장에 파견된 군인력 432명을 지휘했다. [김재훈 기자]

그의 봄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코로나19라는 `포화`가 덮친 대구·경북 지역 한복판에서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렀다. 두 달여의 사투를 마친 뒤 그는 지난 4월 말 400여 명의 `전우`들과 함께 코로나19 방역 전선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코로나19가 남긴 상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산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점을 의식한 듯,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는 한국이 방역 모범국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성실히 이행한 국민과 전국 각지에서 `국지전`을 벌인 모든 의료진의 공이 크다고 말했다. 코로나19와의 사투를 벌인 국군대구병원에서 군의료지원단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서지원 대령을 국군수도병원에서 만나봤다.

―고생 많으셨다. 언제 복귀했나.

▷4월 28일에 대구병원에서 마지막 코로나19 환자가 퇴원하며 임무를 마쳤다. 그 뒤 수도병원으로 돌아와 예방 차원에서 2주간 자체 격리기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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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는 재회한 건가.

▷격리기간을 마치고 나서 지난주에 만났다. 2월 초부터 집을 떠나 있었으니 석 달 만이다.

―대구병원 군의료지원단에 지원하셨다.

▷국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2월 초부터 인천공항 검역소에 파견나가 있었다. 원래 2월 말까지 임무를 마치고 수도병원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복귀할 시기가 오자 대구·경북 지역에서 갑자기 하루에 수백 명씩 확진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구병원도 코로나19 확진자를 수용할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병원장에게 안부인사 겸 전화를 해보니 상당히 많은 인원이 내려올 것 같다고 하더라. 간호사와 군의관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관급 군의관도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때 내려가서 같이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국군대구병원장으로 근무했다. 대구병원에 대해 잘 알고, 그때의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인천 검역소와 대구병원에 갈 때 스스로 손 들고 갔는데, 원래 사명감이 투철한가.

▷특별히 그렇진 않다. 누군가 해야 할 업무를 하는 것인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대구병원 이야기를 해보자. 상당히 숨 가쁘게 돌아갔을 것 같다.

▷처음 내려간 게 2월 27일이었고, 코로나19 확진자를 받기 시작하기로 한 날이 3월 7일이었다. 그런데 대구 지역에서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자 이게 5일로 앞당겨졌다.

―뭐가 문제였나.

▷감염병 환자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을 리모델링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군병원은 보통 근골격계, 즉 근육이나 뼈를 다치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또 적은 의료인원으로 많은 환자를 보기 위해 벽이 다 뚫려 있는 구조다. 그러니 감염병 환자 30~40명을 한 방에 넣어놓고 진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4인 이하 병실로 만들어야 하는 공사가 바삐 진행됐다. 또 음압병실을 만들기 위해 이동형 음압기를 입원실마다 설치해야 했다.

원래는 공사가 끝난, 깨끗한 상태에서 의료진이 투입돼 병실이 세팅된다. 그러나 대구병원은 그게 동시에 진행됐다.

―그 뒤엔 어떻게 운영됐나.

▷건물이 지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자원한 의료진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160여 명의 군의료지원단을 포함해 총 432명의 의료인력에 대한 업무 분장을 마치고 5일부터 코로나19 확진 입원환자를 수십 명씩 받기 시작했다.

―환자 진료는 어떻게 했나.

▷아시다시피 딱히 치료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 증상 치료라고 보통 표현한다. 열이 나든지 기침을 하면 그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식이었다. 증세가 악화돼 숨이 가빠지면 산소 치료를 하고, 더 안 좋아지면 벤틸레이터(인공호흡기)를 대줘야 한다. 다행히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만큼 상태가 악화된 환자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환자 몸 안에 있는 면역체계가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도록 증상을 호전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수백 명의 확진자가 대구병원에 입원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70대 할머니였다. 그분은 대구병원에 입원하기 바로 전날 남편을 코로나19로 떠나보낸 분이었다. 코로나19로 사망하게 되면 바로 화장한다. 빈소를 차리거나 할 수가 없다. 남편을 잃자마자 본인 역시 코로나19 확진판정을 받은 것이다. 입원 당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감염병도 이겨내야 하는데, 가족을 잃은 슬픔 또한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드렸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함을 느꼈다. 치료도 치료지만 우선 이분의 애통함을 덜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님과 정신과 군의관을 전담으로 붙여 지속적으로 상담하게 했다. 확진자와는 면회가 불가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녀들과도 수시로 통화하면서 일가족이 받은 충격을 조금이나마 줄어드리려 했다.

국군대구병원 파견 당시 방호복을 입고 진료하는 서지원 대령. [사진 제공 = 의무사령부]

국군대구병원 파견 당시 방호복을 입고 진료하는 서지원 대령. [사진 제공 = 의무사령부]

―할머니는 괜찮아지셨나.

▷증상이 악화돼 중증환자를 진료하는 타 병원으로 전원가셨다. 다행히 그곳에서 상태가 호전돼 퇴원하셨다고 들었다. 치료 과정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대부분은 결국 완치돼 웃으면서 병원을 나갔다. 그런데 이분만은 예외였다.

―가장 긴박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갑작스레 수혈을 해야 하는 환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문제는 그분이 희귀 혈액형인 RH―였다는 점이다. 대구 지역에서는 그 피를 구할 수가 없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인의 절반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결국 울산에서부터 혈액을 가져와 겨우 수혈을 할 수 있었다. 낮부터 구하기 시작해 자정이 지나서야 수혈을 했다. 더 늦어졌으면 위험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을 것 같다.

▷사실 가장 긴박했던 순간은 대구에 급하게 내려간 이후부터 환자를 받기 전까지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입원 시작일이 정해진 상황에서 어찌 됐든 그날까지는 준비가 돼야 했다. 확진자들이 몰려온 다음에 설치기사들이 와서 수리를 하거나 작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의료진, 외부 인력 등 모든 분이 재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기한을 맞출 수 있었다.

―400여 명의 의료진과 동고동락하면서 사투를 벌였다. 단장으로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나.

▷어떤 이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갑자기 대구로 온 경우도 많았다. 8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정상 더 있어야 하는 동료도 많았다. 상황이 어떻든 이 모든 동료·후배들이 각자 자리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아마 가장 어려웠던 점은 `혹시 나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어떡하지` 하는 심리적 압박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가족 걱정을 하고, 또 가족 역시 자신들을 염려하고…. 다들 힘들었을 것이다.

―의료진 중 감염된 사례는 없었나.

▷대구병원 의료진 사이에서도 발열 증상을 보이거나 기침을 심하게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럴 경우 의료진 모두가 생각이 많아진다. 그 친구가 괜찮아야지 나도 괜찮으니까. 증상을 보인 의료진 모두 다음날 음성이 나와 천만다행이었다. 8주간 쉬지 않고 일하다보면 꼭 감염이 아니더라도 아픈 일이 생길 수 있지 않나. 그럴 때면 단장으로서 `후배들이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구병원은 아니지만 진료 중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한 의료진도 있었다.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분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평소에 굉장히 성실히 진료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그렇고, 이곳 대구병원 의료진도 `남 일이 아니다`는 심리적인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병원에 있는 의료진이 심하게 동요하지 않았다지만, 관련 소식을 들은 가족이 화들짝 놀라 전화를 많이 해왔다.

―어떤 부분이 제일 힘들었나.

▷160여 명의 의료진이 여러 곳에서 파견 오다보니 처음에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낯선 환경이었다. 게다가 가족과 오래 떨어져 생활하다보니 불편함이 컸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쟁과도 같은 재난을 대비하는 기간이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답답함이 커졌을 것이다. 역경을 딛고 제 몫을 다해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대구병원에서의 코로나19 확진자 의료 지원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8주간 이곳에서 같이 고생하면서 서로 격려해준 전우애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를 빌려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임관하자마자 대구병원에 투입된 75명의 초임 간호장교들도 화제였다.

▷숙련되지 않은 어린 졸업생들에게 과한 임무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방호복도 입을 줄 모르고, 관련 교육도 받지 않은 이들이었다면 그 논리가 맞는다. 그러나 2014년 서아프리카 에볼라 때 국군구호대가 현지에 파견된 이후 간호사관학교에선 감염병 교육을 상당히 많이 실시해왔다. 이에 더해 대구 파견 직전 재차 교육도 실시했다. 초임 간호장교들이 위험에 많이 노출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했고, 훌륭히 맡은 바 임무를 해내는 모습을 보고 선배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이 매우 뿌듯해했다.

―대구병원을 비롯한 의료진을 응원하는 국민 성원이 대단했다.

▷대구병원 정문에 `대구·경북 지역 국민과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확진 판정을 받고 오는 환자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다는 의료진의 의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그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대구 지역민들의 성원은 이 같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의료진을 응원하는 편지도 써주시고, 간식도 전해주시고…. 힘들 때마다 정말 큰 힘이 됐다. 우리를 응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기억에 남는 후원물품이 있나

▷국군대구병원 인근에 자그마한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어린 학생들이 의료진들을 위해 십시일반 용돈을 모아 간식으로 떡을 보내준 적이 있다.

특히 간식들은 우리 의료진들에게 너무나도 큰 힘이 됐다. 8주간 매일 똑같은 도시락전문점에서 점심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나중에는 물리게 되더라. 그럴 때 후원품으로 들어오는 치킨 한 마리는 정말 꿀맛이었다. 치킨 뿐 아니라 피자, 햄버거, 샌드위치, 빵, 마카롱 등 가끔씩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인근 커피숍 사장님은 본인이 직접 커피 수십 잔을 차에 싣고 병원 위병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 지난 석 달여 동안 코로나19 방역일선에서 많은 것을 느끼셨을 것 같다. 끝으로 하고픈 말이 있으신가

▷앞으로 2차 대확산이 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장기간 생활방역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긴 시간 순응해도 국민들이 지치지 않는 수준의 지침 말이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

▷전역 이후 말인가? 언제 전역하게 될진 모르겠으나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병원장 직책에 오래 있다보니 거의 움직이지를 못했다. 아내와, 딸 둘과 함께 제주도에서 한 1년쯤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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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is…

서지원(47) 국군수도병원 진료1부장은 육군사관학교(53기) 출신이다. 졸업 후 야전에서 소대장을 거친 그는 이후 4년간 서울대 의대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 상대를 제압하는 `주먹`보다는 피를 공급하는 `심장` 역활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후 국군수도병원, 육군본부, 의무사령부 등에서 진료와 정책 부서를 두루 거쳤다. 대구, 청평, 양주 등에서 군병원장을 지냈다. 코로나19 군의료지원단에서 복귀한 그는 현재 국군수도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연규욱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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